잉글랜드 축구의 상징과도 같았던 연말 풍경이 올해는 사뭇 다를 전망이다. 프리미어리그(PL) 사무국이 발표한 연말연시 일정에 따르면, 오는 12월 26일 ‘박싱데이’에는 단 한 경기만이 배정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맞붙는 이 경기는 맨체스터 올드 트래포드에서 오후 8시에 킥오프할 예정이다. 예년 같으면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축구 축제를 즐기기 위해 가족, 친구들과 경기장을 찾았을 팬들에게는 낯선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통상적으로 박싱데이는 주중과 주말을 넘나드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이벤트였다. 하지만 올해 PL 사무국은 “이번 시즌 박싱데이 경기 수가 대폭 축소된 점을 인지하고 있으며, 이는 잉글랜드 축구의 중요한 전통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인정했다. 이러한 변화의 주된 원인은 유럽대항전의 확대다.
UEFA 일정 확대가 불러온 나비효과
유럽축구연맹(UEFA)이 지난 시즌부터 챔피언스리그를 포함한 주요 대항전에 조별리그 대신 ‘리그 페이즈(League Phase)’ 방식을 도입하면서 각 팀이 소화해야 할 경기 수가 늘어났고, 대회 기간 또한 기존 6주에서 10주로 대폭 확장되었다. PL 측은 “이번 시즌 리그 경기를 배정할 수 있는 주말이 단 33주에 불과해 일정 편성에 심각한 제약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다음 시즌 박싱데이는 토요일인 만큼 더 많은 경기가 편성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팬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잉글랜드축구서포터협회(FSA)는 성명을 통해 일정 발표가 2주나 지연된 점을 지적하며, 박싱데이에 단 한 경기만 배치한 것은 무책임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가족 단위의 관람 문화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맨유의 흑자 전환, 그 이면에 감춰진 칼바람
박싱데이의 유일한 주인공이 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경기장 밖에서도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최근 발표된 재무 보고서에 따르면 맨유는 1,330만 파운드(약 230억 원)의 영업 이익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690만 파운드의 손실을 기록했던 것과 대조적인 성과다. 유럽 대항전 부재로 인해 중계권료와 매치데이 수익, 상업 수익이 모두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둔 실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흑자 전환의 배경에는 이네오스(Ineos) 그룹과 짐 랫클리프 경이 주도한 고강도 구조조정이 있었다. 구단은 직원들의 복지 혜택을 축소하고 대규모 감원을 단행하는 등 비용 절감에 사활을 걸었다. 오마르 베라다 CEO는 “이번 재무 결과는 구단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회복 탄력성을 반영한다”며 “지난 1년간의 어려운 결정들이 지속 가능한 비용 구조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장기적으로 스포츠 및 상업적 성과를 개선할 수 있는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부채 증가와 주축 선수 매각의 딜레마
하지만 긍정적인 지표 뒤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맨유의 총부채는 글레이저 가문의 인수 당시 발생한 부채를 포함해 9월 30일 기준 7억 4,800만 파운드라는 기록적인 수치에 도달했다. 구단은 회전 신용 편의(Revolving Credit Facility)를 통해 1억 500만 파운드를 조달했는데, 이는 이네오스의 구조조정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단의 자금 사정이 여전히 타이트함을 시사한다.
특히 이번 흑자 달성에는 선수 매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첼시로 4,000만 파운드에 이적한 알레한드로 가르나초의 매각 대금이 없었다면 재무제표의 결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또한 테조스와의 계약 종료 후 새로운 훈련복 스폰서를 찾지 못한 점도 상업 수익이 9% 감소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현재 맨유는 리그 선두 아스널에 승점 8점 뒤진 6위를 기록 중이며, 지난 시즌 15위라는 충격적인 성적에 비해서는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구단 측은 삭감된 비용을 바탕으로 남녀 팀 모두에 대한 투자를 이어가겠다고 밝혔으나, 팬들은 재정적 안정화가 실제 경기력 향상과 우승 경쟁력으로 이어질지 예의주시하고 있다.